그림책

[그림책] 나는 강물처럼 말해요

yoolymph 2021. 3. 17. 11:30

“물거품이 일고 소용돌이치고 굽이치다가 부딪친다”



분노로 일그러진 날들이 기억난다. 열 살 때 맨발로 집을 뛰쳐나가 동네방네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다닌다. 열여덟이 되어서도 화를 못 참아 방문을 부수고 교과서를 다 찢는다. 뜻대로 안 되는 어느 날 컴퓨터 모니터를 부순 적도 있다. 어떤 이유에서건 화를 못 참는다. 본래 ‘화’밖에 없고 나머지 일상은 ‘꾸며낸 나’로 살았다. 꽤 긴 시간 꾸역꾸역 화를 참으며 살았다. 내게 유난히 나보다 슬픔이 넘쳐나는 친구가 있다. 스무 살, 친구는 부모님이 이혼하고 집이 없어져 내게로 찾아왔다. 그리고 우리 집에서 일주일을 지냈다. 정확히 어떤 사연으로 집을 나오게 되었고 친구가 왜 슬픈지 안 물었다. 그 뒤 친구는 월세 10만 원짜리 곰팡내 나는 지하방으로 이사했고, 다음 해 친구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장례식장에 가서 친구를 어떻게 위로할 줄 몰랐다. 내 아픔을 감당 못하니 친구의 아픔이 보였을 리 만무하다.

아이는 입안을 맴도는 단어를 뱉어내지 못해 괴로워한다. 누구라도 자기에게 말을 시킬까봐 지래 겁먹는다. 커다란 잘못을 한 사람처럼 두려움에 떤다. 사람들이 자기를 보고 이상하게 여길까만 생각한다. 아마 누군가 말을 더듬는다고 비웃듯 말했겠지. 아이 안에 온전한 세계가 있다는 걸 모르는 이가. 아빠는 긴 잔소리를 늘어놓지 않는다. 그저 아이를 데리고 강가로 가 “알록달록한 바위와 물벌레를 살펴”본다(16쪽). 자연을 몰입하여 바라보다 정리되지 않은 나쁜 경험이 머릿속에 펼쳐진다. 자기에게 닥쳤던 어려운 상황을 떠올리며 눈물을 왈칵 쏟아낼 것 같다. 이 얼마나 귀한 경험인가. 자기 슬픔을 똑바로 바라보는 경험 말이다.

엄마 손에 이끌려 언어 치료 받으러 다니고 여러 가지 놀이와 수 백 개의 낱말이 적힌 플레쉬 카드로 언어의 유창함을 늘릴 순 있어도 ‘아이의 진짜 언어’는 자라지 않는다. 억지로 끌어 올린 유창성은 오래가지 못한다. 아이는 이내 입을 다시 닫을 것이다. 문제는 말 더듬거리는 게 아니라 아이 마음을 꿰찬 두려움이다. 다행히 아빠가 두려움에 움츠러든 아이를 알아본다. 아빠는 아이 자체를 있는 그대로 존중하며 한마디 말을 건넨다. “너도 저 강물처럼 말한단다”(22쪽). 더듬거림을 ‘강물’에 비유한다. 물거품이 일고 소용돌이치지만 이상하지 않다. 흐르는 모양새가 복잡하게 요동치는 마음과 똑같다. 강을 바라보고 풍덩 빠져 헤엄치면서 알게 된다. 말 더듬는 건 잘못된 게 아니라는 걸. 강물이 흐르는 것처럼 아주 자연스러운 거라는 걸. 아이는 사람들을 위로하는 ‘진짜 자기 언어’를 가진 시인이 되었다.

나는 내 감정을 철저히 소외시켰다. 슬픔이란 없어. 무조건 즐겁고 웃어야 해. 그래야 친구도 사귀고 이 세상 아무렇지도 않게 살 수 있어. 거짓 즐거움으로 포장한 일상을 꾸역꾸역 살았다. 이십대가 되어 가족과 거리를 둘 기회가 종종 생겼다. 러시아로 미국으로 될 수 있는 한 길게 머물 수 있는 일정으로 여행했다. 짧은 외국어로 구구절절이 사연을 이야기 할 수 없었기에 더듬더듬 할 말만 한다. 오히려 내 감정을 정확히 표현한다. 좋다 싫다 아프다 슬프다 화난다. 그렇게 마음의 언어를 배웠다. 여행을 마치고 친구들과 책 읽는 모임을 하면서 내 (마음) 언어는 무르익었다. 나는 이제 아프면 아프다고 말하고 지난 슬픔을 똑바로 쳐다본다. 이젠 아이 셋 엄마가 된 친구를 찾아가 그때 네 슬픔에 온전히 함께 해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그럼에도 잘 살아와줘 고맙다고 말할 줄 안다. 그렇다고 더듬거리던 마음이 괜찮아진 건 아니다. 그저 상처 입은 어린시절을 바라보는 정도가 된 거다. “물거품이 일고 소용돌이치고 굽이치다가 부딪”(33-34쪽)치던 그때의 나는 화내지 않는 걸로 유명한 엄마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