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 할머니의 식탁
문을 두드리는 사람, 문을 여는 사람
“할머니의 식탁”을 읽고
나는 평화빌라 나동에 산다. 살면서 매번 느끼는데 이름값 톡톡히 하는 곳이다. 빌라 바로 앞밭에서 매일 반상회를 연다. 이 동네 어르신들은 외로울 틈이 없다. 1988까지 안 가도 여긴 아직 이웃이 사촌이었던 80년대에 머물러 있다. 지난 주 가동 할머니, 나동 할머니들이 앞 다퉈 우리집 문을 두드린다. 김장철이라 바로 담은 김치를 내 입에 넣어 주러 오셨다. 말로는 ‘뭘 이런 걸 가져 오셨어요’라고 했지만 저녁밥에 먹을 반찬 고민을 하고 있던 터라 반가운 손님이다. 할머니가 만든 건 뭐든 맛있다. 수십 년을 밥하고 국하고 김장했으니 눈 감고도 간을 맞춘다. 할머니 손으로 한 번 휘~ 저으면 마법처럼 음식에 감칠맛이 더해진다. 바로 만든 김치는 소고기 반찬 안 부럽다. 일주일 동안 반찬 고민 끝!
어릴 적 부모님이 문방구를 했던 터라 우리 집 문은 늘 열려 있었다. 특히 물건을 사지 않는 이웃들로 문전성시였다. 문방구 한 켠 뜨끈하게 데워진 아랫목에서 아줌마들이 수다 떨다가 밥 먹는 게 일상이었다. 나는 그때부터 아줌마들과 어울리길 좋아한다.
이십대 때 청년지혜나눔 공동체라는 이름으로 친구들과 작은 규모의 공간을 운영한 적이 있다. 아무나 들어와서 쉬고 먹고 놀 수 있는 공간이라 정말 아무나 막 왔다. 어린 시절 경험 덕분에 나는 꽤나 손님 접대를 잘 했다. 가끔가다 험상궂게 생긴 사람이 와도 나와 성향이 맞지 않는 도인이 와도 내쫓지 않았다. 실은 싫은 티 안 내려고 본심을 꾹꾹 누르느라 힘들었다. 사람을 가리지 않기로 약속한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지금 돌이켜보면 굉장한 환상에 빠져 있던 시기다. 누구나에게 평등한 사회를 꿈꿨고 친구들과 함께 공부한다면 세상의 빈곤을 없앨 수 있을 거라는 커다란 착각에 빠져있었다. 자만심이 하늘을 찌르던 시기다. 과거는 언제나 부끄럽다. 내 빈곤도 어쩌지 못하면서 세상의 그것을 어떻게!? 다만 그 시절 꾸역꾸역 누구나에게 문 여는 훈련은 기가 막히게 했다. 문을 여는 건 세상에 나를 드러내는 일이고, 꽁꽁 감추고 있던 내 치사하고 나약한 모습을 보이고야 마는 그런 일이다. 그리고 끝내 인정한다. 하나 잘난 거 없는 나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라도 문은 열어야 한다는 걸. 그래서 지금도 그냥 아무 목적 없이 사심 없이 이웃의 문을 두드리고 내 집 문을 연다. 오무 할머니가 그런거처럼.
<할머니의 식탁>은 작가가 오무 할머니에게 보내는 헌사다. 할머니가 만든 토마토 스튜 냄새가 온 동네를 가득 채운다. 냄새와 함께 귓가로 들리는 “똑똑”. 바로 문을 두드리는 소리다. 할머니는 가리지 않고 누구에게나 문을 활짝 연다. 할머니가 넉넉하게 끓인 스튜 덕분에 동네 사람들은 주린 배와 영혼의 허기를 달랜다. 곧 놀라운 장면이 짠~! 냄비에 스튜를 다 퍼 주었는데 다시 다른 것들로 채워지는 장면. 할머니 요리를 맛 본 사람들은 감사한 마음을 샐러드, 케잌, 편지 등으로 표현한다. 문을 두드린 사람과 문을 연 사람 모두 한바탕 잔치를 벌인다.
할머니가 나눠 준 건 토마토 스튜만이 아니다. 스튜 안에는 여태껏 살아오면서 켜켜이 쌓아 온 긍정 에너지와 너그러운 사랑이 담겨 있다. 할머니는 꼬마, 공사장 일꾼, 핫도그 장수에게도, 의사, 변호사, 사장에게도 똑같이 대한다. 내가 생각한 ‘이상’(빈곤없는 세상)은 결국 오무 할머니가 다 이룬다. 할머니가 거저 내어 준 사랑을 듬뿍 받은 사람들이 다른 이들에게 가서 똑같이 할 거다. 결국 아름다운 세상이 되는 건 시간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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