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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수영장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관객석에 앉아있는 걸 즐긴다. 선명한 파란색과 수영하는 사람들. 내 몸은 따뜻하고 촉촉한 공간을 마음껏 느낀다. 그리고 상상한다. 내살과 네살이 닿는 뜨거움을. 야하지 않아도 좋다. 그저 살갗이 닿는 끈적이고 습한 촉감이 좋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숨만 쉬어도 된다면. 아무것에도 얽메이지 않는 자연의 몸이 된다면.  온전히 쉴 수 있는 시간, 완전히 너와 한몸이 되는 끈적한 순간. 베토벤의 비창을 들으며 나의 슬픔을 너의 품에 던진다. ...

나는 지금 너와 함께 있는 장면을 현실이 아닌 다른 차원의 시공간으로 그린다. 소설 쓴다는 핑계를 대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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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이슬이 반짝이는 거 봤어?”

<염소 시즈카의 숙연한 하루>를 읽고

로자

 

스물 아홉, 내 꿈은 탈서울이었다. 서울은 멋진 사람들이 많고 훌룡한 대안 공간이 모여 있다. 덕분에 친구를 많이 사귀었고 잘 배웠다. 그럼 뭐하나. 해도 해도 너무 많은 자동차들, 밤까지 불 켜진 커다란 빌딩, 골목 곳곳 넘쳐나는 쓰레기. 서울을 위해 많은 지방(매연을 내뿜은 공장과 핵발전소는 주로 지방에 있다)들이 희생하고 있다는 죄책감까지. 나는 더 이상 서울에서 버티기 힘들었다. 나와 신랑은 새로운 정보와 유행이 아닌 더 진실하게 자기를 들여다 볼 시간과 환경이 필요했다.

 

프로젝트를 맡아 장기간 시골에 머문 적도 있고, 시골서 자급자족하는 친구들 집에서 몇 날 며칠을 머물며 산 적도 있다. 그때엔 나같이 나약해 빠진 서울 사람이 거친 야생의 세계에서 어떻게 살아남으리 걱정 가득이었다. 튼튼한 체력도 단단한 정신력도 없었던 시절, 나는 겁을 잔뜩 먹었다. 돈 없이 어떻게 살아. 신랑이 박봉의 협동조합 사무국장 일을 그만 두던 날 바로 제안이 들어왔다. 듣도 보도 여행 한 번 안 와본 당진에서 일자리가 생겼다고. 먹고 살 걱정 안 해도 되는 꽤 괜찮은 자리였다. 돈 걱정 없어지니 가벼운 마음으로 서울을 탈출했다. 돌고 돌아 드디어 꿈을 이뤘다.

 

서울 생활 못지않은 쓰레기 배출에 흙을 밟지 않는 일상. 아직 반쪽짜리 도시탈출이지만 시간 날 때마다 틈틈이 논밭이 펼쳐진 시골에 가고 아이를 시골 유치원에 보낸다. 여기저기 뚜벅이로 다니느라 내 몸은 자주 자연에 맞닿아 있다. 바람 소리 새소리 물소리 벼들끼리 부딪히며 내는 사각사각 소리를 잘 듣는다. 논두렁을 걷다가 팔짝 튀어 오르는 메뚜기를 보며 깜짝 놀라고 꽃잎에 내려앉은 화려한 무늬 나비들을 보며 눈에 생명의 아름다움을 담아간다.

 

시골이 아름답기만 한 건 아니다. 죽음을 기다리는 사람들로 가득한 곳에서 아이 울음도 어린이가 뛰노는 소리도 듣기 어렵다. 길가에 처참하게 찢기고 망가진 채 죽어있는 동물을 본다. 한 달에 두 건 정도 시청에 동물 사체를 접수한다. 주로는 자동차에 치여 죽은 아이들이고 가끔 집에서 키우다 병들어 버려진 아이들도 있다. 태어나서 아름다움 뽐내며 살았을 사슴, 고라니, , 고양이들이 흙바닥에 아스팔트 바닥에 누워있다. 볼 때마다 가슴이 철렁 눈물이 또르륵. 나는 이렇게 자주 (살아있든 죽어있든) 동물과 곤충을 보는 것을 귀한 경험이라 여긴다.

 

매미가 나무에서 뚝 떨어져 맴맴거리던 소리 안 들리고, 먹잇감 포착한 개미들은 매미를 들고 줄 맞춰 행진한다. 그와중에 시즈카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아름답게 반짝이는 아침 이슬을 발견한다. 아침 댓바람부터 단순한 죽음과 찬란한 생을 동시에 경험한 시즈카는 가슴 벅찬 숙연함을 경험했을까. 시즈카는 친구들에게 묻는다. “아침 이슬이 반짝이는 거 봤어?” “매미가 죽으면 노래하지 않는 거야?” 먹고 살기 바쁜 친구들은 시즈카의 물음을 고민할 새 없다. 시즈카 조차도 먹어야 살기에 여린 꽃잎 내민 꽃봉오리를 단숨에 먹어치운다. 에누리 없는 끔찍한 자연의 섭리. 아침 이슬도 매미도 개미도 두꺼비도 메추라기도 메뚜기도 꽃봉오리도 시즈카도 다 각자의 방식으로 오늘 여기에 있다’. 생명을 다하기 직전까지 본능에 충실하며 산다.

 

내가 언제까지 이곳에서 살지는 모르겠지만 사는 동안은 흙에서 사는 존재들을 흠뻑 즐길란다. 나에게도 나도 모르는 사이에 생명을 옹호하는 글이 줄줄 새어나오길 기대한다. 그런 의미에서 황진희 작가 책 <우리는 서로의 그림책입니다>에서 인용한 다시마 세이조 에세이 <내 인생의 진국> 중 한 구절을 마음에 새긴다. “감촉은 달라도 다른 생물들에게도 생명의 울림이 있다. 날아가는 새에게도, 밭에 있는 채소에도, 물론 우리 인간에게도. 이 생명의 울림을 그리기 위해 나는 그림책 작가를 계속하는지도 모른다. 그 생명의 파닥거림을 그리려고 붓을 드는 것만으로 그림이 되지는 않는다. 내 몸속에 스며든 것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새어나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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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내가 좋아하는 게 뭔지 한 번 물어봐

<아빠, 나한테 물어봐>를 읽고

로자

 

 

남편은 벽에 붙은 야광별을 보며 아이를 재운다. “오늘은 저기 오리온 별자리 옆에 외롭게 걸려있는 작은 별 이야기로 시작하자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아이는 하루 중 이 시간을 가장 기다린다. 캄캄한 밤, 별을 이야기하는 아빠와 아이. 억지로 아이를 재우지 않고 말도 안 되는 별이야기 귀신이야기 주고받으면서 둘만의 세계에 빠진다. 귀여운 것들. 어느새 아이도 아빠도 쌔끈쌔끈 잠에 든다.

 

남편은 연애시절 엉뚱한 일을 벌이길 좋아했다. 종이비행기를 같이 만들자고 하고 노래를 직접 작사 작곡했다. 생애 처음 혼자 먼 곳(생각해보면 아주 먼 곳도 아니다. 중국 남부와 동남아시아 여행)을 여행한다며 나를 만나 함께 유언장을 썼다. 어느 날은 혼자 거리에서 요란스럽지 않게 1인 시위를 했다. 차분하니 자기 하고 싶은 거 다 하는 사람. 그는 날 보고 이상한 나라에서 왔다고 했고 나는 그를 보며 착하지만 단단하다고 말했다. 난 혹시 아이를 낳으면 어떻게 키울 거냐고 물었다. 그의 말 한마디에 결혼을 하고 아이를 가져야겠다 생각했다. 우리 아빠처럼 키울거야”라고 당당하게 말한다. 엉뚱하지만 안정감있고 요란스럽지 않게 자기 표현을 할 줄 아는 그의 배후에 아빠그리고 가족이 있었다.

 

아이와 아빠가 나들이 나가선 줄곧 아이가 대화를 이끌어 나간다. 아빠는 그저 사랑스러운 눈빛 장착하고 아이 말에 대답 할 뿐. 아이 시선을 따라가며 기러기를 보고 개구리를 보고 나비를 본다. 아이를 따라가다 보니 어느새 아이처럼 놀고 있는 아빠. 떨어진 단풍 낙엽을 주으며 어린 시절을 생각했을까. 아니면 지금 가고 있는 시간을 곰곰 느꼈을까. 아이 말을 하나 놓치지 않고 대답하는 아빠는 아이만을 위해 있지 않는다. 어느새 본인도 아이처럼 낙엽에 뒹굴며 가을을 즐기고 있다. 둘 다 편해 보인다. 그리고 끈끈한 애착도 보인다.

 

아이가 태어나고 아빠가 된 그는 잘 하는 편이다. 딱 맘에 들진 않지만 그럭저럭 잘 해내고 있다. 주말에만 온전히 만날 수 있는 아빠와 요리도 하고 종이접기도 하고 산책도 한다. 그러다 말이 전혀 안 통할 때도 가끔있다. 어른의 머리로 아이를 이해하려니 여간 어려운 일이겠는가. 그럼 어떠랴. 우리는 원래 다 다른 종들이고 서로를 다 알 수 없는 게 당연한 사람들이다. 그럴 때 그림책 도움을 조금 받으면 그만이다.

 

아이가 심오한 질문을 하곤 답이 석연치 않으면 때를 쓰며 운다. 대답이 성의가 없든 자기 마음에 안 들던 했겠지. “외계인은 어디서 왔어?” 등의 알 수 없는 황당한 질문들을 받으면 아빠고 엄마고 정지 상태가 된다. <아빠, 나한테 물어봐>에서 아빠가 그랬듯 그냥 물어보는 거다. 아이에게 되묻는 것. 세상은 복잡하고 어려운 것 투성이처럼 보이지만 실은 참 간단하다. 관심 가져주고 물어 봐주기. 무조건 할 수 있는 것들이다. 왜냐. 너란 아빠는 나란 엄마는 우리 아이를 엄청 사랑하니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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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함께 살아갈 것이다

<달 밝은 밤>을 읽고

로자

 

<달 밝은 밤>을 읽으면서 가난한 아빠와 유복하게 자란 엄마 사이에서 태어난 나를 만난다. 나는 어릴 때 겉으로만 착하지 아주 독한 아이였다. 아빠가 술을 먹고 깽판을 부리며 우리 가족을 힘들게 한 날이면 가차 없이 경찰을 불렀다. 그 전에는 외삼촌에게도 이모에게도 전화를 했지만 한 다름에 달려와 나를 보호해 주는 이는 없었다. 경찰이 오면 아빠는 정신을 차리고 괜찮다고 가보라고 아무렇지도 않은 척 그들을 보내기 일쑤였다. 그때 경찰은 신고한 아이 상태나 그 집 상황을 꼼꼼히 확인하지 않았다. 그럴 의무도 권리도 없었던 거지. 가정 일은 가정에서 처리하는 게 원칙(?)이란다. 그러기를 몇 번. 더 이상 나는 누구에게도 내 안전을 지켜 줄 것을 기대하지 않았다. 내 분노는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가득 찼다.

 

저녁에 가게 문을 닫고 술 마시고 어린 자녀들을 앉혀놓고 하는 말은 똑같다. 자기가 너무 불쌍하다. 어린 시절 너무 가난했다. 길바닥에 버려진 김치 쪼가리를 가져다 곪는 배를 채웠다. 그리고 지금도 힘들다. 힘들어. 가난하고 못 배운 아빠는 결국 자식들에게 삶의 밑바닥을 보여 준다. 무기력하고 열등한 마음으로 할 수 있는 건 최선을 다해 술 마시는 것 밖에 없다. 괜찮은 척 그냥 그대로 살 수 없기에 술로 시간을 버티는 거다. 그 순간만큼은 화도 아픔도 잠시 잊을 수 있어서. 못났다 못났어. 어른이고 부모인데 참 무책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십대에 근현대사를 배우고 광주로 청계천으로 시청 광장으로 집회를 다니며 슬픈 역사를 간접 체험했다. 아빠의 분노는 여기서부터 시작되었구나. 외로움에 사무치는 고단한 어린 시절, 무섭고 힘들었던 군대 생활, 살아남기 위한 숱한 노동. 나는 어느 날 아빠 안에 안쓰러운 아이와 청년을 발견한다. 그날 내 분노는 슬픔으로 바뀌었다.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는 사연 아닌가. 그때 나는 처음으로 그가 부끄럽지 않았다. 불우한 어린 시절을 지나 자기 삶을 포기하지 않고 전력을 다해 살았다. 그의 가난과 슬픔이 온전히 그의 책임이 아닌데 누굴 욕하겠는가(욕하고 싶은 사회와 사람은 많다). 자주 밖으로 나돌던 나는 여행을 하면서 만난 그 지역 최고의 술을 사서 아빠에게 선물했다. 이왕 마시는 거 맛있는 술 마시라고.

 

가난한 우리는 슬픔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버티며 산다. 그림책 속 아빠는 술로 엄마는 가출로 아이는 캄캄한 밤을 유일하게 밝혀주는 달님에 기대어. 아이는 이를 악물고 달님을 보며 스스로를 지키기로 다짐한다. 그림책은 내내 주인공 아이 시점으로 이야기를 끌고 간다. 책장을 모두 넘기고 이제 끝이구나. 아이는 이제 오롯이 혼자서 삶을 버텨내야 하는구나. 아이고 불쌍해서 어쩌냐 라며 속상해 하며 책을 덮었다. 그런데 뒷표지에 마지막 문장이 나타났다. 시점이 아이에서 작가로 이동하여 아이에게 엄청난 약속을 한다. “우리가 함께 살아갈 것이다.”

 

이게 가능이나 한 말인가. 내가 아이를 슬픔에서 건져낼 수 있을까. 모르겠다. 실은 자신이 없다. 대안 교육 판에서 만난 지인이 내게 물었다. “로자는 이 아이를 어떻게 키울 거예요?” 나는 바로 답했다. “나도 아직 다 안 컸는데 어떻게요. 우선 나나 잘 클라고요.” 아이한테 뭘 자꾸 해 줄라고 할 때 아이는 더 힘들어진다. 결국 내 부족함을 아이를 통해 자꾸 채우려는 욕심밖에는 안 된다. 내가 보기엔 뭔가를 가르치려는 어른보다 아이들이 나을 때가 훨씬 많다. 그래서 나는 분노에 차 힘겨워 하는 불쌍한 어린 시절 나를 끌어안고 토닥토닥 하는 것부터 하는 중이다. 그 사이 내 아이는 저절로 커서 나를 보며 환하게 웃어주고 있다. 고맙게. 이런 아이와 함께라면 그림책 속 그 아이와 손을 잡고 신나게 놀 수 있지 않을까 상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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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의 진심

<나는 기다립니다>를 읽고

로자

 

손가락으로 짚으며 빨간 끈을 따라가다 보면 누군가의 한 생애가 이어진다. 헐떡이며 책장을 넘기다 보니 생이 끝나고 생이 다시 시작된다. 일생이 주마등처럼 휘리릭 지나간다 한다. <나는 기다립니다> 주인공은 기다리면서 인생이라는 것에 가치를 찾아간다. 태어나고 기다리고 애타고 사랑하고 책임지고 죽고 또 다른 생명을 기다리고. 때론 설레이고 때론 절박하고 때론 쓸쓸하고.

 

인생은 정말 살만한 가치가 있는가. 늘 열심히 행복해지려고 열심히 사랑하려고 하지만 결국 어두컴컴한 밤 책상 앞에서 인생은 정말 살만한 가치가 있는 걸까?’라는 뿌리 깊은 질문을 던져버리고 허무라는 단어만 썼다 지웠다 반복한다. 인간의 삶은 도무지 욕심 욕망 끝없이 뭘 바라고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한 집착밖에 없다. 기억해야 한다. 뭐라도 기억해야 이 불안하고 앞이 보이지 않은 캄캄한 생을 이어갈게 아닌가. 어둠을 뚫고 나아갈 빛 한 줄기를 찾아야 한다.

 

나에게 진지한 순간이 드문드문 있다. 꼬불꼬불하게 생겨야 자연스러울 모래강을 파헤치고 반듯하게 한다는 4대강 개발을 반대하려고 사당역에서 용산까지 삼보일배(세 걸음 걷고 한 번 절하고)한 적이 있다. 생지옥이 따로 없는 세상에서 그래도 희망의 끈을 놓을 수 없다는 사람들이 모여 제일 겸손한 자세로 시위를 이어갔다. 삼보일배는 말 그대로 세 걸음 걷고 온몸을 땅에 바짝 대며 절하는 것을 말한다. 아무 외침도 없이 그저 이마를 땅에 대고 일어나 걷는다. 처음엔 이 힘든 걸 해서 뭐가 바뀔 수 있나 의문이 들었다. 그래도 4대강은 쫌 아닌 게 분명하니 함께 하고자 했다. 한 시간이 흘렀을까. 내 옆으로 빠르게 지나는 사람과 자동차가 느껴지지 않고 오로지 나에 집중한 순간이 찾아왔다. 내 보잘 것 없는 한 걸음이 사당역에서 이수교차로 그리고 한강대교까지 향하고 있다. 이렇게 작은 인원이 무슨 세상을 바꿔 라며 의심을 거두지 않던 순간, 머리를 숙이고 이마를 땅에 대었더니 수많은 풀벌레, 개미, 잡초가 있었다. 자세를 낮추니 나만큼이나 작고 느릿느릿 가는 생명을 발견한다. 그때 참 진지하게 이 작고 작은 생명들이 잘 살도록 빌었다.

 

그러던 내가 아이를 가졌을 때 참 고민이 많았다. 기다리던 기쁜 소식이지만 마냥 좋지만 않았다. 지금 여긴 바다에는 쓰레기가 둥둥 떠다니고 모래강에 살던 흰수마자 같은 작은 생명은 이제 볼 수도 없다. 공평한 기회는 바랄 수도 없는 부자들을 위한 나라에 태어나 내 아이가 무엇을 바라며 살까. 나를 왜 태어나게 했냐고 울며불며 다시 뱃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떼라도 쓰면 어쩌나. 그래도 세상에 나오겠다고 대차게 발차기를 해대는 아이를 낳지 않을 뚜렷한 명분이 없었다. 결국 불평 불만만 늘어 놓던 철없는 나는 누군가를 책임져야 하는 어른이 되었다. 두 손바닥에 다 담기는 작디 작은 생명이 잘 살도록 빌었고. 죽음 말고 삶을 선택했다.

 

태어날 적부터 붙들고 있는 빨간 끈을 놓지 않고 느리지만 천천히 걷다보니 아직도 살고 있다. 어떻게 보면 아이가 엄마를 기다리고 쌩판 남인 남자가 여자를 애타게 기다리고 사랑을 하고 자기 자식을 애지중지하고 옆에 있는 사람이 아프지 않길 간절한 마음으로 바라며 기도하고 또 새로 태어나는 생명을 기다리는 순간에 진심이 가득하다. 이렇게 나의 마음이 부정에서 긍정으로 바뀌고, 순간 순간 빛춰오는 밝음을 끌어 모으다 보면 또 살아지는 게 인생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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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 멍청이라 하건 말건, 날마다 타박타박 걸어서

<까마귀 소년>을 읽고

로자

 

아이는 학교와 멀리 떨어진 외딴 산골에 산다. 입학을 하자마자 모든 게 낯설다. 낯설 수밖에. 허름한 옷차림, 외소한 몸, 그런 아이를 무시하고 소외시키는 선생과 반 아이들. 아이는 학교 다니는 게 무섭다. 꼴찌로 외톨이로 땅꼬마로 사는 게 힘들다. 자기만 힘들고 다들 행복해 보인다. 도대체 이곳에서 무얼 할 수 있을까. 결국 누구에게도 간섭받지 않고 혼자 할 수 있는 걸 궁리한다. 사계절 바뀌는 풍경, 세상 온갖 소리들, 땅꼬마보다 작은 벌레 보고 만지기. 다들 사쿠라같은 단어 외우고 친구 사귀기 바쁜 날에 아이는 묵묵히 자기 자리를 지키며 알아서 배운다. 아이들이 땅꼬마라 놀리고 선생님이 공부 못한다고 구박하거나 말거나 한결같이 타박타박 걸어”(16) 학교에 온다. 아이는 혼자서도 엄청 잘 논다. 세상은 놀라운 것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니까. 땅꼬마는 이미 어느 누구보다 심지가 굳은 아이로 커간다. 이소베 선생님은 그런 아이를 찰떡같이 알아본다.

 

아무 편견없이 아이를 바라보는 일을 하려면 틀에 가두는 교육이 당연한 학교에서 엄청난 용기가 필요하다. 교육 헌장을 외우게 하거나 군국주의에 쩔은 단어와 문장을 읽히는 학교(1955년 이전 일본 학교)에서 아이들을 데리고 뒷산에 올라가는 선생이라니. 이소베씨는 부강한 나라를 위한 새나라 일꾼으로 만들 욕심만 한 가득인 곳에서 나무를 보고 꽃을 보라 하는 선생이다. 눈이 동그레지면서 땅꼬마에게 자연을 배운다. 그런 선생이니 땅꼬마를 알아 본거다. 이 아이 보통이 아니다. 자연에서 알게 된 걸 그림으로, 삐뚤삐뚤 글씨로 펼쳐내는 예술가다. 선생은 수업이 끝나고 아이들이 모두 떠난 교실에서 땅꼬마랑 단둘이 아이 안에 깊숙이 자리잡은 두려움을 꺼내어 함께 이야기 했을 거다. 둘은 자연이 아닌 사람들과도 소통하기 위해 멋진 일을 꾸민다.

 

나에게도 멋진 스승이 있다. 중학교 3학년 때 담임이었던 주상태 선생님. 선생님은 친구들과 잘 어울리지만 왠지 쑥쓰러움도 많이 타고 외로워 보이는 내게 학급 문집을 만드는 일을 맡겼다. 문집에 실을 내용이 참 많았다. 매일 자유롭게 누구나 적는 날적이, 매달 열리는 농구대단치, 발야구대회. 소풍 날이면 떼거지로 몰려 다니는 단체 소풍에 함께 하지 않고(이게 공교육에서 가능했다고? 교장 싸인이랑 학부모 싸인만 있으면 가능했다!) 우리 반만 서울 시내, 청계산, 수원 화성, 월미도로 갔다. 소풍을 위해 답사만 두어 번 간 기억이 난다. 시험지도 남달랐다. 중학교 3학년 2학기 국어 중간고사 마지막 문제는 시를 짓는 거다. 형식도 정답도 없다. 시를 지으면 다 동그라미. 놀기만 한 우리를 위한 시험지다. 우리 반은 한 번도 놓치지 않고 꼴지였지만 단합은 1등이었다.

 

3학년 여름방학. 우리 반 단합을 보여 준 사건이 있다. 일명 민아 찾기 프로젝트’. 꼴지반답게 깻잎 머리에 엉덩이 바로 밑까지 싹뚝 자른 교복 치마 입은 아이들이 몇 있었다. 그 가운데 민아는 참 예쁘고 조용한 아이였다. 그런 아이가 여름 방학이 되어 아르바이트를 한다고 나가선 집을 안 들어온다. 민아 엄마는 울며 불며 선생님한테 전화를 했다. 방학이라 선풍기 바람 쏘이며 수박 뜯어 먹던 난 학급 연락망에 적힌 대로 내 위에 있는 친구에게 전화를 받았다. 전원 소집이다. 우리는 그날로 날마다 아침 10시부터 오후 2시까지 조별로 움직이며 민아 찾기를 시작했다. 민아를 찾았을까. 결국 선생님은 민아를 찾았다. 민아는 청소년을 보호하는 시설에 있었다. 그곳에 가기 전까지 어떤 사연이 있었는지는 모른다. 민아의 날들이 고되었을거라는 추측만 할 수 있을 뿐. 민아는 엄마에게 돌아갔고 2학기가 되어 매일 학교에 왔다. 사건 사고 많은 반이라 문집도 100쪽이 넘는다. 문집팀원들은 학년말 날마다 만나서 문집 편집하느라 서로 단짝이 되었다. 

 

다시 이소베 선생 이야기로 돌아가자. 선생님은 아이들이 가진 온갖 능력을 알아보고 마음에 새긴 상처를 들여다본다. 그리고 사람들과 만나게 한다. 동네 사람들까지 다 모인 학예회 무대에 선 아이는 자기가 타박타박 학교 오는 길에 집에 가는 길에 수없이 들은 까마귀 소리를 흉내 낸다. 까마귀 소리에 희노애락을 담아내니 놀라지 않을 사람이 없다. 모두들 6년 내내 존재감 없던 아이에게서 감동을 느낀다. 그리고 특별한 이름도 지어준다. ‘까마둥이’. 원문에 뭐라고 적혀있는지 모르지만 독자로서 까마둥이가 사랑스럽고 좋다. 이소베 선생은 까마둥이가 바깥세상에서 잘 살아낼 수 있도록 돕니다. 까마둥이는 사람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걷어내고 누구보다도 사람과 잘 어울려 살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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