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이슬이 반짝이는 거 봤어?”
<염소 시즈카의 숙연한 하루>를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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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 아홉, 내 꿈은 탈서울이었다. 서울은 멋진 사람들이 많고 훌룡한 대안 공간이 모여 있다. 덕분에 친구를 많이 사귀었고 잘 배웠다. 그럼 뭐하나. 해도 해도 너무 많은 자동차들, 밤까지 불 켜진 커다란 빌딩, 골목 곳곳 넘쳐나는 쓰레기. 서울을 위해 많은 지방(매연을 내뿜은 공장과 핵발전소는 주로 지방에 있다)들이 희생하고 있다는 죄책감까지. 나는 더 이상 서울에서 버티기 힘들었다. 나와 신랑은 새로운 정보와 유행이 아닌 더 진실하게 자기를 들여다 볼 시간과 환경이 필요했다.
프로젝트를 맡아 장기간 시골에 머문 적도 있고, 시골서 자급자족하는 친구들 집에서 몇 날 며칠을 머물며 산 적도 있다. 그때엔 나같이 나약해 빠진 서울 사람이 거친 야생의 세계에서 어떻게 살아남으리 걱정 가득이었다. 튼튼한 체력도 단단한 정신력도 없었던 시절, 나는 겁을 잔뜩 먹었다. 돈 없이 어떻게 살아. 신랑이 박봉의 협동조합 사무국장 일을 그만 두던 날 바로 제안이 들어왔다. 듣도 보도 여행 한 번 안 와본 당진에서 일자리가 생겼다고. 먹고 살 걱정 안 해도 되는 꽤 괜찮은 자리였다. 돈 걱정 없어지니 가벼운 마음으로 서울을 탈출했다. 돌고 돌아 드디어 꿈을 이뤘다.
서울 생활 못지않은 쓰레기 배출에 흙을 밟지 않는 일상. 아직 반쪽짜리 도시탈출이지만 시간 날 때마다 틈틈이 논밭이 펼쳐진 시골에 가고 아이를 시골 유치원에 보낸다. 여기저기 뚜벅이로 다니느라 내 몸은 자주 자연에 맞닿아 있다. 바람 소리 새소리 물소리 벼들끼리 부딪히며 내는 사각사각 소리를 잘 듣는다. 논두렁을 걷다가 팔짝 튀어 오르는 메뚜기를 보며 깜짝 놀라고 꽃잎에 내려앉은 화려한 무늬 나비들을 보며 눈에 생명의 아름다움을 담아간다.
시골이 아름답기만 한 건 아니다. 죽음을 기다리는 사람들로 가득한 곳에서 아이 울음도 어린이가 뛰노는 소리도 듣기 어렵다. 길가에 처참하게 찢기고 망가진 채 죽어있는 동물을 본다. 한 달에 두 건 정도 시청에 동물 사체를 접수한다. 주로는 자동차에 치여 죽은 아이들이고 가끔 집에서 키우다 병들어 버려진 아이들도 있다. 태어나서 아름다움 뽐내며 살았을 사슴, 고라니, 삵, 고양이들이 흙바닥에 아스팔트 바닥에 누워있다. 볼 때마다 가슴이 철렁 눈물이 또르륵. 나는 이렇게 자주 (살아있든 죽어있든) 동물과 곤충을 보는 것을 귀한 경험이라 여긴다.
매미가 나무에서 뚝 떨어져 맴맴거리던 소리 안 들리고, 먹잇감 포착한 개미들은 매미를 들고 줄 맞춰 행진한다. 그와중에 시즈카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아름답게 반짝이는 아침 이슬을 발견한다. 아침 댓바람부터 단순한 죽음과 찬란한 생을 동시에 경험한 시즈카는 가슴 벅찬 숙연함을 경험했을까. 시즈카는 친구들에게 묻는다. “아침 이슬이 반짝이는 거 봤어?” “매미가 죽으면 노래하지 않는 거야?” 먹고 살기 바쁜 친구들은 시즈카의 물음을 고민할 새 없다. 시즈카 조차도 먹어야 살기에 여린 꽃잎 내민 꽃봉오리를 단숨에 먹어치운다. 에누리 없는 끔찍한 자연의 섭리. 아침 이슬도 매미도 개미도 두꺼비도 메추라기도 메뚜기도 꽃봉오리도 시즈카도 다 각자의 방식으로 오늘 여기에 ‘있다’. 생명을 다하기 직전까지 본능에 충실하며 산다.
내가 언제까지 이곳에서 살지는 모르겠지만 사는 동안은 흙에서 사는 존재들을 흠뻑 즐길란다. 나에게도 나도 모르는 사이에 생명을 옹호하는 글이 줄줄 새어나오길 기대한다. 그런 의미에서 황진희 작가 책 <우리는 서로의 그림책입니다>에서 인용한 다시마 세이조 에세이 <내 인생의 진국> 중 한 구절을 마음에 새긴다. “감촉은 달라도 다른 생물들에게도 생명의 울림이 있다. 날아가는 새에게도, 밭에 있는 채소에도, 물론 우리 인간에게도. 이 생명의 울림을 그리기 위해 나는 그림책 작가를 계속하는지도 모른다. 그 생명의 파닥거림을 그리려고 붓을 드는 것만으로 그림이 되지는 않는다. 내 몸속에 스며든 것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새어나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