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 파도야 놀자
"파도야~ 어디 한 번 와봐라. 내가 감당해낼테니"
<파도야 놀자>를 읽고
로자
<파도야 놀자>를 보면서 마냥 신나고 행복하지 않았다. 흑백의 모래사장, 청백의 파도. 가만 가만 보고 있으면 절로 우울해지는 색이다. 바다에 가면 카페에 들어가 바다가 훤히 보이는 자리에 앉는다. 파도는 방파제에 사정없이 부딪히고 갈매기는 새우깡 던지는 사람들 근처에 우르르 몰려 든다. 나는 바다에 가까이 가 파도와 만나기 싫다. 가까이 가면 금방이라도 나를 삼켜 먹을 것 같은 파도가 무섭다. 그러다 살금살금 내 속에 있던 어떤 아이가 다가와 속삭인다. “파도에게 가까이 가서 냄새도 맡아보고 소리도 들어보고 만져봐.”
아이는 엄마와 바다에 도착했다. 용감하게 엄마의 손을 놓고 파도에게로 다가간다. 킁킁 냄새를 맡기도 하고 파도가 조금이라도 가까이 오면 도망도 친다. 파도 흉내를 내면서 쪼매난 몸으로 “나 얕보지 마~” 파도에게 경고를 날리기도 한다. 아이는 당연하게 자연과 대화할 줄 안다. 어린 아이일수록 대지와 교감하는 능력은 어마하다. 주인공 아이처럼 파도와 밀당을 하거나, 동물의 말을 이해하거나, 새소리만 들어도 새의 기분을 안다. 어른은 절대 흉내 내지 못하는 것이지. 아이는 왼쪽에서 오른쪽 책장으로 선을 넘어 파도 가까이 가려한다. 결국 경계를 허물고 파도에게 간다. 파도가 아찔한 높이로 다가와도 ‘메롱~’하는 여유까지 장착. 바닷물에 흠뻑 젖고 아이는 어느새 바다색이 되었다. 파도와 하나가 되어 혼이 쏙 빠져라 뛰어 논다. 둘은 완전히 친구가 되었다.
오늘, 어릴 적 가끔 엄마 손잡고 갔던 친할머니 집에 혼자 갔다. 그녀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지금 뭘 먹으며 어쩌고 사는지 모른다. 알고 싶지 않다. 카페에 앉아 파도를 바라보듯 그녀를 바라보고만 싶었다. 가고 싶지 않았지만 왜인지 오늘은 가야만 할 것 같아서 그녀가 사는 지하방에 갔다. 쾌쾌한 곰팡이 냄새, 햇살 좋은 날에 빛 하나 안 들어오는 작은 방. 정리하지 않고 쌓아놓은 짐뭉텡이들. 마스크를 쓰고 만나는 시절이라 한숨 내쉬는 내 표정을 들키지 않아서 천만다행이다. 할머니는 나를 만나자마자 다짜고짜 “애를 잘 키워야 한다. 나는 애를 못 키워서 이렇게 늙어서까지 마음이 아파”라며 내내 간직해 온 슬픔을 자기 방식으로 토로한다. 아들을 먼저 보내고 하루하루 빠르게 늙어가는 할머니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뭘 도와드려야 하는지. 내가 어디까지 그녀의 인생에 관여해도 되는지. 도무지 감이 안 잡힌다. 내게 너무 낯선 파도가 눈앞에 있다. 선을 넘어? 말어? 진심 모르는 척 하고 싶다.
할머니는 열아홉에 시집가 그해 아빠를 낳았다. 너무 어린 나이에 시뻘건 핏덩이를 품에 안아 어쩔 줄 몰랐다. 아이에게 젖 한 번 물리지 않고 집을 나갔다. 핏덩이는 다행히 외할머니 손에 컸고 좀 커서는 이모네서 눈칫밥 먹으며 자라고 그도 여의치 않을 땐 여기저기 떠돌며 혼자 자랐다. 아빠는 할머니를 창녀라 했다. 의정부 미군부대 근처 술집에서 일했다니 그럴 만도 하다. 나는 궁금해 하지 않았다. 십년 전 어느 날 할머니는 자발적으로 그 오해를 풀어 주었다. 자기가 너무 어려서 자식을 돌보지 못했지만 술집 창녀는 아니라고. 아는 언니 소개로 바텐더 일 했다고. 어쨌든 아빠가 혼자 알아서 자란 건 사실이다. 공책 살 돈 주라고 찾아간 엄마는 화투 치느라 바빠서 아이에게 꺼지라고 했단다. 그 후 엄마와 아들은 평생 남으로 살았다.
지하방에 앉아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끄덕끄덕 할머니 이야기를 듣기만 했다. 그러면서 머릿속에 그녀를 닮은 ‘파도’를 그려보았다. 파도는 바위에 부딪히고 자기를 부수는 과정을 반복한다. 상처입고 자책하고 아파하고. 파도가 지나간 자리에 어떤 흔적들이 남았다면 그건 티내고 싶고 이해받고 싶은 상처일거다. 아이가 쓸어 담은 게 어른들의 상처라니. 나는 결국 엄청난 상을 받은 작가의 아름다운 그림책을 망쳐버리고 말았다. 참 독하다 독해. 하지만 세월이 흘러 다시 <파도야 놀자>를 보며 다른 해석을 할 수도 있지 않은가. 그러기 위해 나는 내 삶의 이야기를 이어 갈 거고 할머니라는 파도를 감당할거다. 그래서 그림책 속 아이처럼 인생의 다른 파도들과 당당하게 친구 먹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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