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 고래들의 노래
쓸모에 대하여
<고래들의 노래>를 읽고
<고래들의 노래>에 나오는 릴리는 참 복이 많다. 신비로운 옛 이야기를 들려주는 할머니가 곁에 있고, 고래들이 나오는 바닷가 근처에 산다. 릴리는 할머니가 들려주는 예쁜 돌멩이, 성한 조개껍데기, 고래들의 노래, 선물이라는 아름다운 말들에 푹 빠져 잇몸까지 드러내며 환히 웃는다. 할머니는 손녀딸에게 세상이 얼마나 경이로운 곳인지 꼭 알려 주고 싶다. 꿈같은 이야기 그만하라는 할아버지 말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이야기를 이어가는 할머니의 강단을 보라. 고기와 뼈와기름으로 대표되는 약육강식의 현실에 대해, 어떤 부정도 거부도 하지 않는다.그저 담담히 인류 이전부터 있어왔던 신비로운 고래 이야기를 이어간다.
릴리는 하루 종일 방파제 끝에서 고래를 기다린다. 자신이 선물한 노란 꽃에 대한 고래의 응답이 듣고 싶어서. 그러던 중 릴리에게 할아버지가 다가온다. 역시나 ‘바보짓’ 하지 말라는 핀잔을 늘어놓는다. 끝까지 일관성 있게 짜증내는 할아버지도 당연히 이해는 간다. 저녁이 되도록 ‘쓸데없는 일에 정신이 팔려’(18쪽) 밥도 안 먹고 있는 손녀가 걱정되어 데리러 온 것일 테니. 릴리는 하는 수 없이 집으로 가지만 고래를 기다리는 일을 멈추진 않는다. 그리하여 기어코 고래들을 만난다. 노란 꽃을 선물 받은 고래들은 춤과 노래로 답례를 한다. 고래들이 자기 이름을 불러 주는 것만으로도 기쁘다. 릴리의 눈이 반짝거리는 걸 보면 알 수 있다. 릴리의 소박한 바람과 꿈같은 경험은 ‘쓸데없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소녀를 더 강하게 해주는 할머니의 오래되고 훌륭한 유산이다.
지난주에 집으로 시청 고용통계과 조사원이 집으로 설문지를 들고 왔다. 고용과 관련한 설문에 응해달라고 했다. 거절할 이유가 없기에 순순히 응했다. 신랑과 나의 학력, 전공, 직장, 직위, 월급 등을 물으러 왔다. 신랑은 번듯한 직장에서 괜찮은 직위에 적당한 월급을 받는다. 나는 가방끈만 그이과 같다. 조사원은 무미건조하게 나에게 직장을 물었고, ‘주부’라고 답했다. 그리고선 조사원은 그 다음 질문은 안 하고 바삐 가방을 챙겨 가버렸다. 자발적으로 설문에 응했지만 찝찝하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난 주로 집안일과 육아를 하고, 여러 가지 모임을 한다. 주부라는 나의 직업을 직장인의 임금노동과 비교하니 괜히 쫄린다.
사회는 나를 돈 안 벌고 동네일(모임)에 참견하기 좋아하는 쓸모없는 아줌마로 분류하려나. 여긴 옛 이야기 해주는 인자한 할머니도 없고, 난 고래는커녕 공장들이 연기를 내뿜는 바닷가 근처에 산다. 그곳에 고래는 없다. 릴리의 할아버지가 말한 것처럼 쓸모 있는 것(임금 노동자)이 되어야 하는 세상에 서있다. 그렇담 여태껏 쓸데없는 일에 정신 팔려있는 걸까. 답은 당연히 아니다. 나의 정체성을 통계로 다 표현할 수 없다. 난 아이와 남편에게 꼭 있어야 하는 엄마이자 아내이며, 스스로도 충분히 잘 살 수 있는 방법을 터득할 줄 아는 자유인이다. 사람들과 만나 서로를 ‘쓸모’가 아닌 ‘존재’ 자체로 인정하고 잘 살아내고 있다고 위로한다. 주부라는 애매한 직업으로부터 벗어나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나만의 답을 찾는다. 그리하여 내 아이에게 ‘쓸모있는 인간이 되라’ 강요하는 세상에서 살아갈 힘을 선물하려 한다. 할머니가 릴리에게 한 것처럼 오염되지 않은 아주 신비로운 이야기를 들려 주면서. /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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