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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자가 사는 이야기 yoolymp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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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아름답게 하는 일
<미스 럼피우스>를 읽고

신랑에게 <미스 럼피우스>를 읽어 주었다. “세상을 아름답게 하는 일은 왜 마지막에 하는 거야?” 가만히 듣던 그가 한 질문이다. 맞다. 젊을 때 혈기 왕성할 땐 왜 그 생각을 안 한 거지. 그러면서 미스 럼피우스가 순탄한 삶을 살았을 것 같지만 실은 실패를 많이 했을 거란다. 오랜만에 그의 의견에 동의한다. 세상의 진리를 찾아 책이 있는 곳에서 일하고, 꿈에 그리던 세계 여행도 하고, 따뜻한 사람들의 환대를 받아가며 인생을 꽉 채운다. 원하던 대로 바닷가 언덕 위에 집에서 산다. 누구보다 자기가 꿈꿔온 것들을 하나씩 이뤄가며 살았다. 시간은 야속하게도 계속 흐른다. 두둥. 누구도 비켜갈 수 없는 외로움의 시간을 맞이한다. 숨 가쁘게 달려온 몸이 아프다. 신랑과 나는 아마도 살면서 겪은 실패와 고뇌가 몸에 통증으로 고스란히 새겨진 게 아닐까 추측해 본다. 나이가 들고 또 아프고 나서 자기 삶에 정착한다. 그제야 할아버지가 한 말이 떠오른다. 돈벌이하느라 자기 꿈 이루느라 바빠서 놓쳤던 그 말.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일을 해야 한다는 말.

미스 럼피우스는 할아버지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자기가 사는 마을에 루핀 꽃씨를 뿌리기로 한다. 루핀 꽃을 보며 기뻤던 경험을 많은 사람과 나누고 싶어서일 게다. 다른 이들이 기뻐한다면 세상이 아름다워 지는 거라 확신했을까. 정신 나간 늙은이라는 소리까지 들어가며 엄청난 양의 꽃씨를 뿌려댄다. 감나무에서 감을 따고 밭을 경작해 먹을거리 수확하기 바쁜 사람들에게 이상하게 보일만하다. 먹고 사는 일과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지 않은가. 꽃씨 뿌리며 산다는 건. 그것도 대단한 사명인 듯 180리터나 되는 거대한 양의 씨를. 무씨도 배추씨도 토마토 씨도 아닌 꽃씨를 말이다. 미스 럼피우스는 마음의 심지가 단단한 사람이다. 사람들이 뭐라 하든 상관없이 자기 일을 한다. 결과는 다행히 성공이다. 마을 곳곳은 온통 루핀 꽃으로 가득하다. 사람들은 미스 럼피우스를 향해 손을 흔들며 그녀의 일을 인정하고 고마워한다.

꽃은 보기엔 아름답지만 바위투성이 땅을 차가운 눈이 뒤덮인 땅을, 뚫고 올라와 싹을 틔워야 한다. 굳이 이렇게까지 하면서 살아야 해? 하지만 꽃은 살아서 아름답게 ‘존재’하는 걸 택한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단단하고 견고한 세상의 편견과 살 떨리게 추운 치사함을 견디지만 ‘실재’한다. 난 미스 럼피우스가 한 "세상은 벌써 아주 멋지다"(18쪽)는 말에 완전히 동조할 수 없다. 내가 느껴온 세상의 반은 치사하고 비열하고 이기적이며 탐욕스럽고 더럽다. 생을 긍정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통증을 견디지 못하고 우울함에 빠져 세상과 등지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세상까진 모르겠고 그녀만큼은 멋지다. 통증을 견뎌내고 바깥세상으로 나와 자기 신념대로 살면서 건강해진다(24쪽 참조). 꽃도 미스 럼피우스도 자기 생을 거부하지 않고 세상에서 사람들과 ‘실재’한다. 그거 자체로 멋짐 폭발이다.

요즘 신랑은 비정규직으로 일하는 거에 대한 불안함을 토로한다. 일하러 당진에 왔지만 안정적이지 못한 일자리로 우린 아직 정착하지 못했다. 그는 먹고 살기 위해서 꼭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든든하긴 하지만 왠지 모르게 미안하다. 우리 가족을 위해 엄청난 무게의 짐을 이고 지며 살고 있구나. 신랑의 불안함을 덜어 주기 위해 한마디 말을 건넨다. “너무 꼭 이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마. 뭘 해서든 우리 둘이 입에 풀칠 할 만큼만 벌고 미스 럼피우스보다 좀 일찍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일을 하며 살면 되지. 무엇보다도 우리가 살아있는 게 중요한 거야.” 그는 엷은 미소를 띠며 “멋진데”라고 한다. 꼬마 엘리스처럼 아직 구체적으로 어떻게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지 모르겠다. 다만 그림책 덕에 내가 기뻐하는 일을 하고 이웃에게 나누면 된다는 건 알았다. / by rosa

Posted by yoolymp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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